Summary
- 오스트리아 99%, 독일 12%. 장기기증 동의율을 가른 것은 국민성이 아니라 서류의 기본 상태 하나였다.
- 기본값은 중립이 아니다. 손대지 않은 사람 전부가 도착하는 결론이고, 대체로 그것을 정한 쪽에 편한 자리에 놓여 있다.
- 좋은 기본값의 잣대는 하나다 — 가장 피곤한 날의 자신도 그대로 둘 만한 상태인가.
오스트리아의 장기기증 동의율은 99%에 가깝다. 이웃한 독일은 12% 남짓이다. 두 나라는 소득도, 의료 수준도, 문화도 그렇게 다르지 않다. 가른 것은 서류의 한 줄이었다. 오스트리아는 동의한 상태가 기본이고, 원하지 않는 사람이 빼달라고 표시한다. 독일은 그 반대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더 이타적이어서가 아니었다. 대부분이 그 칸을 그냥 건드리지 않았을 뿐이다.
아무것도 고르지 않은 자리에도 답은 적혀 있다
기본값은 중립처럼 보인다. 아직 아무 선택도 일어나지 않은 빈자리처럼 읽힌다. 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많은 사람이 도착하는 결론이다. 대답하지 않은 사람의 몫까지 하나의 답으로 세기 때문이다.
이 힘에는 한계도 있다. 99%와 12%는 서류상의 동의율이지 실제로 이루어진 이식 건수가 아니다. 뒤이은 연구들은 기본값을 바꾼 나라에서 실제 기증이 그 격차만큼 벌어지지는 않았다고 본다. 기본값은 출발선을 옮기는 힘이지 결승선까지 데려가는 힘은 아니다. 그래도 출발선 하나를 옮기는 것만으로 대다수의 결과가 달라진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는다.
고르지 않는 것도 고르는 것이다

같은 장치가 한국에서는 돈에 붙어 있다. 퇴직연금 계좌에 돈을 넣어두고 어떻게 굴릴지 정하지 않으면, 정해진 기간이 지난 뒤 미리 지정해둔 상품으로 운용이 자동으로 시작된다. 고르지 않아도 굴러가도록 만든 제도다. 미국에서도 은퇴연금을 '넣겠다고 신청하는 방식'에서 '빼달라고 해야 빠지는 방식'으로 바꾸자, 몇 해에 걸쳐 오르던 가입률이 몇 달 만에 뛰었다.
손대지 않는 이유가 게으름 하나는 아니다. 세 가지가 겹친다.
- 기본값을 권고로 읽는다. 누군가 충분히 따져보고 정해뒀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 바꾸는 데 품이 든다. 클릭 몇 번, 서류 몇 장이 생각보다 무겁다.
- 바꿨다가 잘못되면 내 탓이 된다. 그대로 뒀다가 잘못되면 제도 탓이다.
셋 중 마지막이 가장 세다. 손대지 않는 쪽을 고르면 책임도 같이 넘길 수 있다.
하루는 남이 정해둔 상태로 채워진다
기본값은 서류에만 있지 않다. 하루의 모양도 대부분 미리 정해진 상태 위에서 굴러간다.
| 영역 | 미리 정해져 있는 상태 | 손대지 않으면 도착하는 곳 |
|---|---|---|
| 돈 | 구독의 자동 갱신 | 쓰는 줄 모르고 계속 나가는 지출 |
| 시간 | 일정의 기본 단위 한 시간 | 30분이면 끝날 일이 한 시간이 된다 |
| 주의 | 알림 전체 켜짐 | 집중의 순서가 알림에 끌려간다 |
| 일 | 메시지는 곧 답한다는 무언의 기준 | 하루 종일 켜져 있는 상태 |
| 협상 | 상대가 먼저 부른 조건 | 그 숫자가 기준선이 된다 |
표의 공통점은 하나다. 기본값은 대체로 그것을 정한 쪽에 편한 자리에 놓여 있다. 나쁜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 자리가 손대지 않는 다수에게는 결론이 된다.
받는 자리에서 정하는 자리로
여기서 질문이 두 개로 갈린다. 지금 나를 둘러싼 기본값 가운데 직접 고른 것은 몇 개인가. 그리고 내가 남에게 건네는 기본값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앞의 질문은 점검으로 풀린다. 매달 빠져나가는 돈, 자동으로 켜져 있는 알림, 아무도 정한 적 없는데 굳어버린 회의 길이. 한 번도 고른 적 없는 항목을 찾아 한 번씩 고르면 그만이다.
뒤의 질문이 더 크다. 무언가를 남에게 내미는 쪽이라면 — 제안이든 약속이든 서비스든 — 미리 정해둔 상태가 곧 대다수의 결론이 된다. 어느 쪽에 체크가 되어 있는지, 무엇이 먼저 보이는지, 아무 말 없이 지나가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건 설명으로 덮이지 않는다. 설명은 읽는 사람만 읽지만, 기본값은 읽지 않은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좋은 기본값에는 잣대가 하나 있다. 가장 피곤한 날의 자신도 그대로 둘 만한 상태인가. 기본값은 의지가 넉넉할 때가 아니라 바닥났을 때 작동한다. 그때도 엉뚱한 곳으로 끌고 가지 않아야 잘 정한 기본값이다.
기본값 점검 체크리스트
- 이번 달 자동으로 빠져나간 돈 가운데, 한 번도 고른 적 없는 항목이 있는가
- 켜져 있는 알림 중 내가 켠 것은 몇 개인가
- 아무도 정한 적 없는데 굳어버린 시간 단위(회의 길이, 답장 속도)가 있는가
- 내가 남에게 건네는 기본 상태는, 상대가 읽지 않아도 손해 보지 않는 쪽인가
Business Value 손대지 않은 기본값은 매달 조용히 값을 매긴다. 자동으로 갱신된 구독 몇 개, 한 시간으로 잡힌 회의 몇 건, 켜둔 채 지나간 알림 수백 개가 한 해치로 쌓이면 적지 않은 돈과 시간이 된다. 기본값을 한 번씩 골라두는 일은 그 돈과 시간을 되찾는 동시에, 의지가 바닥난 날에도 판단이 무너지지 않도록 받쳐준다. 반대편도 같다. 남에게 건네는 기본 상태를 정직하게 정해두면 설명하지 않아도 신뢰가 쌓이고, 나중에 해명하는 데 드는 비용이 줄어든다.
고르지 않은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딘가에 미리 적혀 있다가 조용히 대신 답한다. 한 해가 지나 돌아보면, 마음먹고 만든 자리보다 손대지 않아 굳어버린 자리가 더 넓다. 지금 눈앞에 이미 체크되어 있는 칸은 누가 체크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