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ary
- 2017년 공공기관 블라인드 채용은 가릴 항목부터 정했고, 무엇을 볼지는 각 기관에 맡겼다.
- 2023년 출연연 29곳의 조정은 폐지가 아니라 선별이었다 — 학력·경력은 되돌리고 성별·연령·출신 지역·가족관계는 그대로 가렸다.
- 지운 자리는 비어 있지 않다. 기준을 먼저 적지 않으면 그 자리를 인상이 채운다.
2017년 여름, 공공기관 지원서에서 학교 이름이 사라졌다. 사진도, 출신 지역도, 부모의 직업도 함께 지워졌다. 편견이 끼어들 자리를 없애면 판단이 공정해진다는 생각이었다.
9년이 지났고, 그사이 일부는 되돌아왔다. 2023년 1월부터 과학기술 분야 출연연구기관 29곳은 학력과 경력, 추천서를 다시 볼 수 있게 됐다. 실패한 실험으로 읽기 쉬운 대목이다. 그런데 그때 무엇을 되돌리고 무엇을 남겼는지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운 자리는 비어 있지 않다
가리기의 문제는 가린 다음에 시작된다. 빈칸은 그대로 남지 않는다. 학교 이름이 없으면 다른 데서 학교를 짐작하게 된다.
공공기관들이 지원자에게 '블라인드 위반 사례' 안내문을 따로 나눠준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안내문에는 쓰면 안 되는 표현이 줄줄이 적혀 있다. 교내 강좌 이름, 동아리 이름, 장학금 이름, 학교 주소가 들어간 이메일, 지도교수 이름. 이름을 직접 쓰지 않아도 새어 나가는 통로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그래서 가리기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구멍을 하나 막으면 다음 구멍이 보인다. 지원자는 어디까지 지워야 하는지 몰라 되묻고, 기관은 목록을 늘린다. 정작 무엇을 보고 뽑을 것인가는 그 목록 어디에도 없다.
되돌린 것과 남긴 것

2023년의 조정을 폐지라고만 부르면 절반을 놓친다. 되돌아온 항목과 그대로 가려둔 항목이 뚜렷하게 갈렸기 때문이다.
| 다시 보기로 한 것 | 계속 가리기로 한 것 |
|---|---|
| 학력과 전공 | 성별 |
| 경력과 연구 성과 | 연령 |
| 추천서 | 출신 지역 |
| 가족관계 |
두 줄을 가르는 선은 하나다. 그 정보가 일을 해내는 능력과 관계있는가. 연구 성과는 관계있고 출신 지역은 없다. 폐지가 아니라 선별이다.
순서가 뒤집혀 있었다
선별은 원래 첫 단계에 놓였어야 했다.
무엇을 보고 판단할지 먼저 정하면 가릴 것은 저절로 정해진다. 기준 목록에 없는 항목이 곧 가릴 항목이다. 반대로 가릴 것부터 정하면 남은 자리를 무엇으로 채울지는 각자 알아서 하게 된다. 기준이 없는 자리에는 인상이 들어온다.
법은 이미 그 순서대로 쓰여 있었다. 2019년 7월에 시행된 채용절차법 제4조의3은 용모와 키, 체중, 출신 지역, 혼인 여부, 재산, 그리고 가족의 학력과 직업과 재산을 묻지 못하게 했다. 어기면 최대 500만 원의 과태료가 붙는다. 조문이 금지의 근거로 든 말은 '직무 수행과 무관한'이다. 기준은 처음부터 직무 관련성이었고 가리기는 거기서 따라 나오는 결과였다. 그런데 결과부터 시행하고 기준은 각 기관이 알아서 세우도록 6년을 두었다. 기준이 문서로 정리된 것은 오히려 되돌리는 과정에서였다.
같은 문이 다시 열리고 있다
요즘은 지원서를 사람보다 AI가 먼저 읽는 경우가 늘었다. 여기서 공정성을 확보했다는 설명은 대개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민감한 항목을 입력에서 뺐다는 것.
2017년에 했던 말과 같은 말이다. 그리고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지운 정보는 다른 신호에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문장의 결, 경험의 종류, 활동의 이름. 사람이 어렴풋이 짐작하던 것을 기계는 더 촘촘하게 짚어낸다.
여기서 빠져나갈 길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무엇을 근거로 고르는지 먼저 적는 것. 자리를 채우는 일이든 거래처를 정하는 일이든 순서는 다르지 않다.
- 그 선택이 해내야 할 일을 세 줄로 적었는가
- 해낼 수 있다는 증거로 무엇을 인정할지 정했는가
- 그 목록에 없는 정보는 자동으로 가려지는가
- 정하고 난 뒤에 실제로 그 기준으로 갈렸는지 되짚어봤는가
앞의 셋을 건너뛰고 가리기부터 시작하면 공정해 보이는 절차만 남고 판단은 하던 대로 간다.
Business Value 무엇을 보고 고를지 먼저 적어두면 판단 한 번에 드는 시간이 줄고, 고른 뒤에 되짚을 근거가 남는다. 가릴 목록을 관리하는 일에는 끝이 없지만 볼 것을 정하는 일은 한 번으로 오래 간다. 근거가 문서로 남아 있는 결정은 뒤집히는 일이 적고, 설명하는 데 드는 품도 적다. 사람을 고르는 자리든 거래처를 고르는 자리든 셈은 같다.
가리는 일에는 끝이 없다. 목록은 늘 한 줄이 모자라고 새 항목은 계속 생긴다. 무엇을 볼지 정하는 일은 반대다. 한 번 해두면 그 뒤가 조용해진다.
9년의 실험이 값비싸게 알아낸 것은 편견의 크기가 아니라 순서였다. 무엇을 지울지 묻기 전에 무엇을 볼지 먼저 적는 것. 지금 손에 든 판단에 그 순서가 들어 있는지는, 지워야 할 목록이 얼마나 길어졌는지를 세어보면 대체로 드러난다.